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돌프 히틀러/생애 (문단 편집) == 나치 입당 과정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itler%27s_DAP_membership_card.png|width=100%]]}}}|| || 히틀러의 독일 노동자당 입당서 || >히틀러의 이념의 틀을 잡은 것은 1919년 군대에서였다. 무엇보다도 군대는 1919년이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히틀러를 연설가로, 그 시대가 낳은 가장 뛰어난 대중 선동가로 변모시켰다. 마음먹고 선택한 길은 아니었지만 주어진 상황을 잘 활용하면서 히틀러는 정치에 발을 내딛었다. 의지보다는 기회주의와 약간의 행운이 더 크게 작용했다. >----- >히틀러 1권 179페이지 1차 대전이 끝난 뒤, 독일 제국군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사실상 해체되었다. 결국 히틀러는 종전 이후 참전 전에 자신이 생활했던 뮌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뮌헨은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키|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자신을 받아주고 대접해준 곳인 군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였고,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산하 제1예비대대 제7중대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전역 대대에서 하달된 지시는 히틀러를 중대 대의원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즉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데 힘을 쓰기는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비록 이 시절 볼셰비즘 정권 휘하의 대대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병영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에게 뇌리에 남은 듯 하다. 이 시기의 기록은 히틀러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나치가 총통을 신격화하고자 대부분 훼손하였으나, 요아힘 C. 페스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 이 시기의 우유부단한 행적은 히틀러 집권 전까지 나치당을 비롯한 우파진영에서 두고두고 까였다. 일부에서는 히틀러가 당시 활동할 수 있던 군사 단체가 뮌헨의 볼셰비즘 군대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뮌헨 밖에서는 각종 우익집단이나 의용군 등이 활동 중이었다. 즉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제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군에 오래 남고 싶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끝나버린 전쟁에 갈 곳을 찾지 못한 상당수의 군인들은 실업자라도 면하기 위해 가까운 지역의 군 집단에 지원하였고, 그마저도 실패하면 전후의 불안정한 정국에서 남아도는 무기로 정치깡패나 용병집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인생의 방향이 바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공산주의 국가로 탈바꿈한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공포와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히틀러가 뮌헨에 좌파 군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뮌헨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무능한 공화국의 안일한 행정에 힘입어 극좌 공산주의자들은 뮌헨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선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우쌍방의 무차별 테러와, 재산압류, 정치적 숙청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혼란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혁명이란 야만적이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과 아름다운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독일 국민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확한 파악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경험은, 바로 선전과 구호의 힘이었다. 히틀러는 스스로 자신이 "[[카를 마르크스]]에게 많이 배웠다." 라고 인정했는데 그것은 고루한 정치적 이념이 아닌 정치적 이념을 이룩하기 위한 선전효과였다. 광장마다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설하는 사람,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자극적인 선전문구, 수많은 젊은이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히틀러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 [[독일 제국군]]에서는 볼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과는 상이하게 다른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뮌헨의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히틀러는 부대원들의 보안 행적을 조사하는 뮌헨 심문에서 동료 대의원 두 명을 고발했다. 일설에 따르면 히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는 이곳에 굴러들어 온 유대인을 지키는 혁명군이 아니'라면서 코앞에 닥친 싸움에서 부대가 중립을 지킬 것을 역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예비대대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 열심히 가담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히틀러가 좌익정부의 대대 대의원에 속해있으면서도 오히려 볼셰비즘 정권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은 인사로 알려져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9년]] 5월 11일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관여한 바이에른 군대를 모태로 하여 폰 묄 소장의 지시로 바이에른 제국군 제4집단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뮌헨 볼셰비즘 정권 붕괴 후 의용군과 같은 군집단에 의해서 뮌헨 행정이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히틀러 역시 해당 군집단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의 조직을 동경해서 어떻게든 군대에 남으려고 했다. 이 때 당시 뮌헨은 혼란했으므로 새로운 민족주의와 반 볼셰비즘 이론을 군대에 교육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켜본 상관에 의해 이 역할을 받게 되었고, 이때 동료들 앞에서 시국에 대해 연설하면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재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자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던 상태였으므로, 재능을 자각한 순간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19-0289%2C_M%C3%BCnchen%2C_Hitler_bei_Einweihung_%22Braunes_Haus%22.jpg|width=600&align=center]] 그 뒤 의용군에서 독일 내 소수정치단체 조사와 관련하여 정무적인 업무를 하고 있던 중 히틀러는 한 소수 정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명령을 받고 간 곳이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었다. 이 독일 노동자당이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치가 된다. 이 독일 노동자당은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정치활동은 커녕 노동자나 고만고만한 서민들끼리 모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게 전부인 보잘것 없는 조무래기 정당에 불과했다. 허름한 창고를 빌려 열린 당 토론회에 지루하게 앉아있던 히틀러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고트프리트 페더]]의 연설이 끝나고 떠나려던 무렵, 초청받은 바우만 교수가 페더의 연설에 바이에른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자 이에 빡친 히틀러는 바우만 교수를 몰아붙였고 교수는 당혹스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틀러는 열변을 토해내었다. 당시의 당 의장이던 [[안톤 드렉슬러]]는 이 연설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고, 자기가 직접 쓴 책자를 건네며 정치 운동에 참가할 마음이 있다면 찾아오라고 권유했다. 처음엔 코웃음만 쳤던 히틀러지만[* 히틀러는 그 날 일기에 "당 기금이라고는 어린애 용돈 수준 밖에 안 되는 놈들이 황송하게도 나를 받아주시겠단다."라며 비웃기 바빴다.] 이내 심경에 변화가 생겨 이에 응하고 당원번호 555번을 받게 된다. 나치당 당원 번호는 501번부터 시작이므로 55번째 당원이다.[* 나중에 나치당이 맥주홀 폭동 후 재건될 때 히틀러는 당번을 7번으로 바꿔서 초기부터 자신이 7번 당원이었다고 조작했다. 앞번호 54명 중 히틀러의 권력을 원치 않던 대다수는 맥주홀 폭동 때 제거되거나 그 이후 히틀러 본인이 쫓아내 버렸기 때문에 그런 조작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터무니없는 조작을 본 드렉슬러는 1940년 히틀러에게 편지를 써서 "총통 각하께서도 각하가 당원번호 555번이었다는 것은 기억하시리라 믿습니다만."이라는 편지를 보내려다가 히틀러가 무서웠는지 그만두었다.] 참고로 나치라는 단어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에서 National의 Na와 sozialistische의 zi를 합쳐 불렸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나치의 반대파들이 국가사회주의의 두음인 나찌(Nati-)를 영어로 음차해서 부르던 [[멸칭]]이었다. 현재는 워낙 대중화되어 일반인이든 네오 나치든간에 모두 나치라고 부르지만, 히틀러 무리들은 자신들을 NSDAP, 국가사회당 정도로 약칭했다.[* 구[[서독]] 유학경험이 있는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 독일편에서도 이 점에 충실하여 히틀러가 나치와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서 항상 Nazi가 아닌 NSDAP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시절에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라는 이름은 없었고 그냥 독일 노동자당이었다. 자물쇠 수리공인 안톤 드렉슬러가 친구들을 모아 결성한 정치모임에 가까웠지만, 히틀러가 여기서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점차 히틀러 개인의 사당으로 변하고, 1921년 중반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힌다. 안톤 드렉슬러는 히틀러를 뒤늦게나마 견제해보려고 그를 비난하는 책자를 배포했지만 되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는 역습을 당해 당 대표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 이름뿐인 지도자가 된다. 그래도 명색이 당수라서 나름 대접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극우 세력과 교섭, 그리고 당 세력 확장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나치당이 맥주홀 폭동 이후 재건되면서 히틀러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다가 실패하고, 1925년 당에서 자진 탈당했다가 1933년 재입당하였다. 영국 애버딘대학교 토머스 웨버 역사학 교수가 1919년에 새로 설립된 독일사회당(German Socialist party) 창당발기인 대표인 한스게오르그 그라징거의 증언에 기반해 작성된 미공개 문서에서 발견되었는데, 내용은 히틀러가 독일사회당 기관지 사무실에 찾아와 그라징거에게 기관지 기자로 일하고, 당에 합류해 일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돈이 한 푼도 없던 히틀러는 그라징거에게 돈을 빌려달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독일사회당) 기관지에는 일할 자리가 없고 당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고 히틀러에게 대답했다는 글이다. [[http://m.news.naver.com/read.nhn?oid=001&aid=0009647329&sid1=104&mode=LSD|#]]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